2024 개인전
<오타쿠철학>

전시서문

이규식(서울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당신은 오타쿠입니까?”, 무엇이 오타쿠를 오타쿠로서 정체화하는가?

 자조적인 태도로 스스로를 오타쿠라고 여기던 청소년기를 지나 탈덕 또는 휴덕의 삶을 살고 있는 前오타쿠 現미술인에게 ‘오타쿠 필로소피’를 제목으로 하는 전시의 서문 의뢰는 불가항력과도 같이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아마 전시를 찾은, 그리고 찾아올 많은 관객도 이런 측면에서 나와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일본 만화 또는 애니메이션의 조형적인 특징, 소위 말하는 모에 요소를 캔버스 화면 위로 옮겨오는 작가는 이따금 있어 왔지만 이토록 전면적으로 전시와 작품 제목에 오타쿠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만큼 이 표현은 ‘오타쿠계 문화’와 단어 자체의 발상지인 일본에서든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인접국으로서 영향을 받아온 우리나라에서든 강렬하고 무거운 단어이다.
오타쿠라는 사회 현상을 통해 일본의 사회를 분석한 일본의 학자 아즈마 히로키에 따르면 오타쿠란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 그밖에 서로 깊이 연관된 일군의 서브컬처에 탐닉하는 사람들의 총칭’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오타쿠’는 조금 더 폭넓은 의미로 통용되는 듯하다. 단순히 일본발 서브컬처 뿐만 아니라 케이팝 등의 대중문화에 깊이 열광하는 사람들을 칭하기도 하고, 일본문화 전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을 뜻하거나 때로는 집 밖의 생활을 꺼리는 히키코모리적 기질을 가진 사람들을 통틀어 언급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앞서 언급했듯 거부할 수 없는 마력에 홀려 호기롭게 수락한 글을 집필하며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도는 의구심을 지워낼 수 없었다. 바로 ‘작가는 실제로 오타쿠인가?’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궁금증에 대해 그는 자신을 ‘외부 활동을 꺼리고 혼자서도 지식을 탐닉하며 잘 지내는 사람’이라고 설명하며, 그러한 까닭에 가까운 지인들로부터 ‘오타쿠’라고 불려 왔다고 언급했다. 따라서 그러한 맥락에서 홍주희 작가는 한국에서 ‘확장된 의미로서의 오타쿠’라고 보는 편이 더 적확할 테다.
전시 《오타쿠 철학》에서 홍주희는 네 점의 신작을 선보인다. 먼저 <이미지의 입체화>는 제목 그대로 멈춰있는 드로잉을 생성형 AI 툴을 활용하여 움직이는 이미지로 만든 작품이다. 콜라주 형식으로 여러 조각 이미지를 이어 붙인 가로 3.5m 길이의 대형 작품에는 작가가 수채화 물감으로 직접 그린 각종 식물의 드로잉과 일상에서 수집한 이미지, 토끼, 해파리, 조각상 등이 배치되어 있다. 이미지를 수집하고 선별하여 적절한 위치에 배치한 뒤 생성형 AI의 기술을 빌리는 것까지 모든 과정이 작가의 선택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그 결과로 제시되는 ‘움직이는’ 이미지의 모습은 제시된 원본 이미지에서 파생된 2차 창작물, 즉 가공된 이미지이다. <집속에 사람과 코끼리>는 키네틱 작업으로, 전시장 바닥에 설치된 네모난 절연테이프 경계 안에서 작가가 프로그래밍한 대로 랜덤한 궤적을 그리며 움직인다. 한편, 전시의 제목과도 조응하는 <오타쿠적 상상>은 약 1분 남짓한 영상 작업으로, 1998년 일본에서 탄생한 ‘디지캐럿’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작가에 따르면 영상 속에는 두 명의 캐릭터가 존재하는데, 디지캐럿과 인공지능을 탑재한 인간형의 머신이다. 끝으로 건축모형으로 제작된 네 번째 작품은 작가가 건축에 관한 관심으로 모아둔 건축데이터를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거쳐 3D로 변환하여 제작한 작품이다.
 
움직이는 드로잉, 키네틱 아트, 영상 작업, 건축물의 모형까지 다채로운 형식으로 제작된 작업들에게서는 하나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바로 생성형 AI 기술을 작품에 주요하게 사용했다는 점이다. 그중에서도 <오타쿠적 상상>에 대해 조금 더 언급하고 싶다. 디스토피아를 연상시키는 근미래의 황폐한 도시를 걸어가는 여성형 안드로이드와 휘황찬란한 전광판의 풍경, 비트에 맞춰 춤추는 디지캐럿, 이어 디지캐럿이 텔레비전 안을 걸어 들어가 또 다른 형태의 안드로이드로 변모하며 끝나는 짧은 영상을 통해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멈춰진 이미지를 역동적인 무빙 이미지로 전환하는 마법과 같은 기술은 이미 우리 삶에 깊숙이 스며들고 있지만, 여전한 프로그램의 한계로 시시각각 진동하듯 흔들리는 위태로운 이미지와 AI로 완벽히 구현되지 않는 구부러진 손가락의 표현 등은 오히려 이 영상이 생성형 AI 기술을 활용하여 제작되었음을 여실히 드러낸다. 마치 디지캐럿이 애당초 등장할 90년대 후반부터 어떠한 서사적 백그라운드도 없이 단순히 오타쿠계에서 통용되는 모에 요소만을 조합하여 탄생함으로써 오타쿠계의 변화한 구조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처럼, 작가의 작업은 생성형 AI가 제작한 무빙 이미지의 한계를 숨기지 않고 드러냄으로써 원본과 재현, 데이터베이스와 시뮬라르크로서의 2차 창작물의 구조를 전면적으로 드러낸다.
 
<오타쿠적 상상>에서 디지캐럿은 스틸 이미지에서 무빙 이미지로 전환되기 위해 매 순간 기술적인 한계에 부딪히며 프레임 단위로 일그러지고 변화한다. 작가는 두 명의 캐릭터가 등장한다고 언급했지만 사실은 생성되는 프레임만큼의 캐릭터가 등장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동일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2차 창작물을 적극적으로 생산하는 오타쿠에게도 불문율이 있다. 캐릭터가 캐릭터로 존재할 수 있는 코어적인 부분이 훼손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동일한 캐릭터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스크린 너머 스스로 걸어들어가 전혀 다른 마스크를 뒤집어쓴 디지캐럿은 이미 디지캐럿이 아닌 또 다른 존재이다.

 
홍주희 작가는 이번 전시 전반에 걸쳐 오타쿠적 표상으로 설명되는 사회 현상과 구조에 대해 다루고 있는 한편, 본인 스스로는 오타쿠로 의태하고 있다. 태생부터 모에 요소의 조합만으로 등장한 디지캐럿을 적극적으로 차용하고 있지만 작가가 90년대부터 디지캐럿을 알고 있었을지, 그것의 삐쭉 튀어나온 머리카락, 커다란 손발, 고양이 귀, 메이드복, 꼬리 등의 캐릭터 디자인을 알고 있었으리라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적어도 작업에서만큼은 그가 오타쿠들에게서 일반적으로 느껴지는 창작물, 그리고 그 너머에 대한 열망이나 열정은 찾아보기 힘들다. 현대미술의 최전선에서 오타쿠적 이미지를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차용해온 무라카미 다카시가 오타쿠들로부터 오타쿠로 여겨지지 않듯이, 홍주희 역시도 진정한 오타쿠로 보기는 힘들다. 당연히, ‘오타쿠’를 주제로 작업을 지속한다고 해서 그가 오타쿠일 필요는 없다. 무라카미의 발자취가 그렇듯, 오타쿠가 아니라는 특성으로 말미암아 기계적이고 냉철하게, 때로는 잔인하게 오타쿠가 열광하는 요소들과 특징적인 단면을 망설임 없이 다룰 수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본 전시에서 홍주희 작가가 오타쿠 철학이라는 주제를 생성형 AI 기술을 통해 펼쳐내고 있다는 점에서 AI 기술 역시 중요한 키워드로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근작 대비 관객에게 더욱더 친근하게 접근하길 바랐던 작가의 의도가 이번 전시에서 얼마나 효과적으로 구현되었을지 전시를 거치며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특히, 생성형 AI 기술이 나날이 발전해 가고 있는 가운데 이러한 기술을 활용한 창작물이 작업으로써 제시되는 과정과, 보편을 추구하며 누락된 조형에서의 날카로운 미감에 대해서는 고민해 보아야 하는 숙제로 남는다. 또, 작가에게는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으로 대변되는 오타쿠와 마이너한 음악 장르들을 포괄하는 하위문화, 또 여러 세계관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며 대중문화의 새로운 장을 열고 있는 K팝 등의 문화 현상들이 우리 사회의 구조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반대로 사회의 변화에 따라 어떠한 컨텐츠들이 생산되고 있는지를 추척해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이 무궁무진하게 열려있으므로, 그가 앞으로의 작업에서 어떤 행보를 보여줄지도 기대된다.

2023 아티언스 대전
결과보고전

Seoul Art Guide

– 이선영(미술평론가)

홍주희의 [에너지 믹스]는 수소에너지를 통해 깨끗한 물이 만들어지는 기술을 참조했다. 명리학에서 물기운이 많다고 나온 자신의 사주가 과학적 탐구의 계기가 되었다. 우주의 기운은 균형이 중시되기에 물은 불을 끌어들인다. 소리에 반응하는 불 이미지와 여러 단계를 거치는 복잡한 기계장치에서의 물 이미지는 상생한다. 물과 불같은 우주의 근본 요소와 개인의 운명과의 관계는 신화와 과학의 수렴을 말한다. 신화의 세계를 극복한 것이 과학이라고 평가되지만, 신화나 과학은 모두 구조적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한편 사주는 임의적 상상이 아니라 통계학에 기반해 있다는 사고도 있다. 현대과학 또한 근대시대의 결정론을 버리고 통계학을 중시한다. 소우주와 대우주를 연결시키는 관념은 시적이면서도 생태학적 대안이 된다.

아르코 아트앤테크
시연발표회

금번의 한국 문화예술위원회에서 주관한 <아트 & 테크> 프로젝트를 통해 예술적 탐구의 실험적 성격과 더불어 새로운 매체기술과 응용하면서 얻게된 작업의 성과물과  오늘날 동시대 예술에서 신기술이 함의하는 바를 성찰함으로써, 정신적인면과 과학적 수준(the spiritual and scientific level) 를 함양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특히, 서로 무관해 보였던 영역들의 융합은 각기 다른 정보 조각들의 퍼즐 맞추기처럼 뉴미디어 아티스트의 상상력의 공장을 구축하게 하고 미지의 새로운 땅을 탐험하는 듯한 의식의 확장은 분명 진보의 열차에 오르는 경험이었습니다.

   동시에 생물학자들이 유기체는 알고리즘이라고 결론 내리면서, 유기물과 무기물 사이의 벽이 허물어지고, 컴퓨터 혁명이 순수한 기계적 사건에서 생물학적 격변으로 바뀌고, 권한이 개인에게서 네트워크로 연결된 알고리즘들에게로 이동하는 상황적 인식에서 진행해온 예술적 작업을 자유롭게 흐르는 데이터로 전환시켜 자기 자신과 시스템에 가치를 증명받고 평가됨으로서 데이터 흐름에 합류하여 일부가 되고자 하는, 작은 칩이 되어가고 있는것이 아닌가 자문하게 됩니다.

   리서치 과정에서 네트워크 개념을 가지고 21세기의 새로운 형태의 공장인 뇌과학과 마음을 인지 자본주의 (Cognitive capitalism)와 연결함으로써, 다가오는 디지털 경제상에서 노동과 생산의 주체성 그리고 정보경제학에서 신경기반의 경제로의 변환에서 오는 현상과 문제점에 관해 질문하고, 현재 뉴럴링크와 페이스북 같은 기업이 실험중인 우리의 뇌를 인터넷에 연결하는 Brain Computer Interface와 같은 신기술이 우리의 자아감과 자유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고찰해 보았습니다. 또한 네트워크 이론 — 네트워크 이론은 상호작용을 이해하기 위한 언어로서 행렬(NxN) 이라는 단순한 도구를 이용하며 네트워크를 기술한다 — 을 응용하여 뇌영역 간 복잡한 연결 네트워크상의 제어구조를 규명하고 연결성에 대한 정보가 뇌 동작 원리를 파악하는 핵심이라고 보고, 그 회로를 도식화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전자회로와 에너지 동력, 데이터 분석을 결합해 네트워크를 시각화 및 키네틱 아트화함으로써 예술적 작업을 수행하였습니다. 

   시연회에서 아카이브 전시와  비물질적인 경험을 공유하는 의미에서 프로젝트의 콘셉트와 과정을 보여줄 수 있는 영상물을 제작하고자 합니다.

경기예술 융복합
프로젝트 지원사업
아트X 리뷰

말하자면, 유사학자의 실험대로서 아트X

김현주(독립큐레이터)
몇 달 전 문학출판사 편집자들과의 친목 모임 시간의 상당량은 올가 토카르추크(Olga Tokarczuk)의 소설 이야기에 할애되었다. 특히 윌리엄 브레이크의 「천국과 지옥의 결혼」에 등장하는 구절,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가 제목인 소설이 화제였는데 주인공 두셰이코가 심취한 점성학에서 시작해 소설의 메시지인 동물권과 어느새 모 월간지에서 수록하는 별자리 운세의 높은 적중률로 이야기는 재즈처럼 흘러갔다. 21세기도 오분의 일이 지난 시점에서 별자리 운세에 열광하는 분위기에 적잖이 당황했으나 노벨문학상 수상자 토카르추크의 이름값에 주눅 들어 잠자코 있기만 했다. 덧붙여 진정한 21세기는 코로나19 시대에 시작되었다고 언급한 뇌과학자 김대식 교수의 얘기를 떠올렸다. 인간 우주탐사 시대를 위한 스페이스엑스(spaceX)를 설립한 테슬라 최고경영자 일론 머스크(Elon Musk)와 블루 오리진(Blue Origin)이라는 우주 기업을 통해 달 창륙선 사업에 뛰어든 아마존 창시자 제프 베이조스(Jeffrey Preston Bezos)가 이 시대의 드라마틱한 한 축을 차지한다면 전세계에 속수무책으로 쓰러져가는 사람이 난무한 코로나19 시대의 절망이 또 다른 한 축에 있다. 진동의 폭과 낙차가 우주와 참혹한 현실 사이를 비현실적으로 오가는 세기에 현실을 구성하는 숱한 얘기들이 소위 과학적인 정합성만을 갖추어야 한다고 믿는 게 더 어리석은지 모른다. 또한 과학적인 정합성이 있다고 추측하는 세계도 절반만의 세계일 수도 있다. 그날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를 선물 받고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홍주희의 리서치가 아니었다면 더 오래 잊고 있었을지 모른다.

우선 리서치를 충실히 따라가 본다. 뇌과학, 명리학, 예술 사이의 선긋기―이 선은 주지하다시피 직선이라기보다는 다른 차원에서의 선긋기에 가까운데―를 시도하는 홍주희는 코로나19 시대의 불확실성이 확실성의 외양이라는 오인된 폭력으로 행사되는 현상에서 출발한다. 그는 팬데믹 시대의 자유민주주의 첨병 미국에서 벌어지는 인종차별과 싱가포르 집단감염이 벌어진 이주노동자들의 거주지, 팬데믹을 들어내더라도 작동하는 불평등, 부정의의 문제를 시사하며 ‘우리 사회가 디스토피아를 닮아가고 있는가에 수긍할 수 있다면 어떤 대안적 사유를 고민해야 하는가’를 묻는다. 통섭이 과학 특히 뇌과학적 경합과 간섭에서 벌어진다고 가정할 때 상상력의 지대를 넓혀서 과학, 예술, 미래 예측학으로서의 명리학을 연결지어 진동시킨다면? 이 같은 질문이 홍주희의 전제로 설정되었다. 그는 과학-기술을 통해 네트워킹된 유비쿼터스 삶(Ubiquitous Life)의 도래가 예술 환경에도 근간을 이룬다고 본다. 다만 한가지 보정이 필요하다면 ‘기술로서의 예술이 아닌, 영혼의 따뜻함(Warms of soul)과 같은 기술이 장착된 예술’을 요청하고 있다. 여기에 명리학은 패턴이 지도화(mapping)된 지식체계로서 가치를 지니며 과학적 문화와 인문적 문화의 단절을 극복시킬 수 있는 예지학(visionary)의 역할을 수행한다고 믿고 있다. 그의 논리로는 명리학의 전망(vision)은 뇌과학에서의 시지각(visual perception)과 무관하지 않으며 시각예술에서 시지각적 연구는 감성과 인식 사이의 모호한 분리를 연동시켜 작가적 전략화를 야기한다고 보는 것이다. 좁혀진 과학과 예술의 역할과 범위 사이에서 주역(周易)의 64괘는 양과 음의 이진 구조의 괘가 6효로 구성되어 총 6비트(64)의 정보량을 갖는데 이는 유전 암호의 최소 단위 코돈(codon)과 상응하여 유비적 관계로 설정된다.

 

홍주희의 방향성은 뇌과학에서 인공지능으로, 인공지능과 명리학의 융합으로, 인공지능과 명리학을 예술로 넘나든다. 인공지능에서 딥러닝의 논리인 생성적 적대 인공 신경망의 논리와 미학적 시뮬레이션으로의 변종인 창의적 적대 인공 신경망이 새롭게 개진한 창의적 프로세스에 대한 우리 시대 애호 혹은 혐오와는 별개로 트랜스휴머니즘의 등장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것이다. ‘엉뚱한 예술가의 각도’에서 접근하는 상상의 기술, 지식의 입체화는 중앙처리장치(CPU)에서 소프트웨어인 명리학의 십성(十星)을 통해 입출력된다. 결론적으로 음양과 더불어 순환하는 오행의 상생, 상극의 섭리는 디스토피아로의 속도를 전이시켜 아름다운 세계를 꿈꾸게 만드는 동인이 된다. 디스토피아에서 아름다운 세계, 즉 유토피아까지는 아니더라도 참혹한 세계를 등지기 위한 서사의 궤적은 퍽 매끄럽게 구성되어 있으며 밟고 싶은 포석을 따라 주역이 쓰인 시대부터 동시대까지를 아우른다. 삶의 불가지론적 회색지대를 수긍하기 때문에 통계학으로서 명리학을 폄하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같은 의미에서 토카르추크가 점성학으로부터 우주의 섭리, 그 섭리 안에 동물과 나란히 하기 위해 동물의 도구가 되기를 자임하는 인간의 복수를 담을 때 혹여 과도한 장치라고 불쾌해할 수는 있을지라도 허구가 지닌 핍진성의 단면은 부인하기 어렵다. 다만 토카르추크가 픽션의 세계에 개연성을 부여했다면 홍주희의 리서치는 논증에서 봉합되기 어려운 지대를 예술의 이름 아래 열어둔다. 기술 과학적 용어를 통해 예술과 미래 예측학까지를 아울렀기에 나도 이 방식을 차용하여 부연하자면 정보의 처리 과정에서 일어나는 인지 편향 가운데 하나인 인지심리학에서 확증편향이 이 리서치의 통섭에 작동하고 있다는, 나의 확증편향도 고백한다. 다만 너른 지대를 인간학적 지도에 대한 맹신에 입각하여 타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의 말대로 엉뚱한 예술가의 각도에서 새로운 독법이 가능함을 믿어본다.

 

홍주희가 범우주적, 범역사적 서사를 매듭지어 간다면 송창애의 <동충하초의 미학적 가치 탐구와 시각매체의 융합에 대한 리서치>는 동충하초(冬蟲夏草)를 주의 깊게 투과하여 펼쳐지는 생의 섭리로 향한다. 균계에 속하는 버섯의 일종인 동충하초는 언제부터인가 자양강장에 효능이 있다고 널리 알려지면서 그 본연의 섭리와 생리는 차치하고 인간 중심의 효능만이 거론되기 일쑤다. 송창애는 겨울에는 곤충의 몸에 있다가 여름에 풀처럼 나타난다는 동충하초에 대한 일차적이고 표피적인 접근인 ‘다소 충격적인 인상’에서부터 탈각하여 충(蟲)이자 초(草)이며 생사(生死)를 개념적으로 동시에 간직한 생명 활동이 지닌 신비로움, 그리고 이 신비로움의 꺼풀을 벗겨내면 이내 수긍하게 되는 흔한 삶의 이치에 대해 탐문해 간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동충하초가 세상에 누설하고 있는 가장 큰 비밀’ 말이다. 동충하초의 학명, 생리, 분류, 진화의 역사를 아우르면서 공격과 방어라는 태세를 빠르게 취하는 이 버섯도 물러나 바라보면 자연의 낱낱을 이루는 담지자일 뿐이라는 것. 바로 파괴와 죽음, 그리고 재생과 생명이라는 생사의 이분을 넘어서는 가치를 동충하초에서 포착하여 서양 이분법적 세계관 대신 그의 판단으로라면 동양 일원론적 사유체계로의 회복을 염원한다. 그가 ‘동충하초에 대한 감각적 사유와 학문적 연구 과정’을 통해 발견한 ‘공생과 공존에 대한 미학적 가치’는 예술의 조형방식과 융합하는데 일례로 동충하초에 대한 시각적 탐구를 회화적 기법을 통해 도출해 내고 이 아날로그적 시도를 디지털화한다. 또한 코로나19 시대 상황을 은유적으로 반영하는 동충하초×휴먼 드로잉 시리즈를 제작한다. 이들 절차는 죽음과 생명의 경계가 모호한 이미지를 통해 다양한 의미화를 시도한다. 다음 단계에서는 생산된 이미지에서 재현적 요소를 최소화하고 VR 공간에 파노라마 구조와 상단 원형적 공간 연출을 시험한다.

 

미시 서사와 거시 서사가 크게 다르지 않음을 파노라마식 구도에서 드러내며 원형(圓形) 천장은 세계의 원형(原形)을 은유하는 스크린이 된다. VR 공간에 구현한 푸른 심연은 송창애가 동충하초로부터 추출, 번역한 세계관이다. 앞서 홍주희가 자신의 관심사를 유사(pseudo) 연구자적 태도를 빌려 예술가적 연구로 풀어냈다면 송창애는 동충하초라는 모티프를 작품으로 증폭시킨다. 시원적 세계로의 염원과 회복을 갈구하는 이 결과물은 한편 동충하초 아니더라도 구현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질문을 야기한다. 말하자면 이분적 사고가 허물어지는 모든 대상과 사건, 경계를 목도할 때 그로부터 점화되는 의제 설정과 구현에 대한 개연성의 관점에서 말이다. 그렇다면 동충하초여서 문제란 말일까. 그렇지는 않다. 리서치라는 연구의 서사는 동충하초로부터 <WATER ODYSSEY 블루 스토리(가제)>와 <천상열차분열지도>로 발현되었으나 반드시 글의 서사와 구현의 과정이 나란할 필요는 없다. 동충하초균이 기주인 곤충을 집으로 삼듯 어쩌면 송창애의 잠재적 푸른 심연이 동충하초를 기주로 삼아 집을 지었다고 해도 어폐는 없어 보인다. 새롭게 포착하여 끈질기게 탐문하고 그 연쇄가 안팎을 뒤집을 정도로 몰입되어 진행된다면 우주도 미물에 거처하지 않던가. 다만 예술가적 도약이 반드시 그 발 구름대를 이어지고 갈 필요는 없다. 동충하초로부터 생성된 이미지에서 재현적 요소를 지워가듯이 동충하초가 야기한 미학적 의제에서 동충하초를 괄호친다 하여도 무관할테다. 감성적 인식에 대한 학문이 곧 미학이니 출발지에 대한 재귀보다는 다만 미학함의 즐거움 자체에 몰입해 보기를 바라 본다.